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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실 창구에 얽힌 사연
김충수 신부  (Homepage) 2009-06-22 00:11:28, 조회 : 1,400, 추천 : 350

고해실 창구에 얽힌 사연

고해실 창구에 얽힌 사연


신부가 되고 처음으로 고해실에 앉았을 때의 기분은 신부밖에 모른다. 신부가 되기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총고백을 하기 위해서 며칠을 반성하고 통회하고 얼마나 식은땀을 흘렸는지… 고백성사를 제대로 보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식은땀 냄새를   맡는 자리에 내가 앉게 되던 첫날, 나는 무척이나 흥분하고 당황에 있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신부가 되기 전에 이러저러한 죄를 고백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무슨 죄를 고백해올까 하며 은근한 호기심과 엷은   감홍색(?) 흥분 때문에 이두박근이 긴장됨을 느껴야 했다. 그런데   기대했던 거와는 영 딴판이었다. 아니, 그럼 어떤 죄를 듣기를 기대했는데 딴판이란 말인가…?

흔히 들을 수 있는 고백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죄 아닌 죄’(?)를  고백해 온다는 데 문제를 걸고 싶은 것이다.

“조만과를 궐했습니다. 삼종 기도를 빼먹었습니다. 묵주신공을 한번 못했습니다. 이웃 집에 불이 나서 불꺼주느라고 주일미사 한번 궐했습니다. 기도 시간에 분심잠념했습니다. 애들을 야단쳤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너무나 착하고 순진한 우리 신자들의 소박한 고백이다.

그러나 이것이 소박함으로 끝났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실생활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어떤 타성들이 있다는 것을 지적해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진정한 ‘이웃 사랑’을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교의 가장 근본이 되는 사상이고 강론 때마다 듣는 이야기이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태 19, 19).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마태 7, 12).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그런데 고백실 안에서 혹시라도 사랑의 계명을 어긴 것을 고백할 때는 꼭 어떤 이유와 핑게까지 늘어 놓음으로써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음을 엿보게 된다. 예를 들어 “며느리를 미워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 치고 며느리의 죄상을 함께 일러바치지 않는 시어머니가 별로 없는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의 죄만 용서받고 싶은 것이지 남의 죄는 용서해 줄 수 없다는 마음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미사 때 ‘주의 기도’는 낭랑한 음성으로 소리 높여 왼다.

“오늘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스스로 용서의 절대적인 조건을 “우리가 용서하듯이”라고 굳게   힘주어 말하면서도 그 실천은 앵무새에게 돌리고마는 것이다.

용서란 말이 나왔으니 주님께서는 어떻게 용서하라고 가르치셨는지 살펴보자. 우선 당신 자신이 실천하신 것부터 찾아보면 당신이 십자가 위에 높이 매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 34).

이렇게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던 사람들까지 용서해 주시는 주님께서는 “몇 번이나?” 하는 제자들의 물음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 18, 22)고 대답하심으로써 용서란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것임을 가르쳐 주셨다.

참된 이웃 사랑이란 이렇게 용서와 자비를 전제한 가운데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아무리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위로와 사랑을   보낸다 하더라도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서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정신을 닮지 못하는 것이다. 불쌍한 사람을 동정해 주고, 우는 이를 위로해 주고, 아픈 자를 찾아 주고… 하는 것은 서로 밉지 않은 상태일 때는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미운   사람, 원수진 사람, 자기에게 불쾌한 짓을 한 바 있는 사람일 때는  동정이고 자비고 마음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먼저 용서하는 마음을 배우고 모든 잘못하는 이들을 향한 너그러운 이해와 그리스도적 자비를 배워야 한다.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 비결은 첫째 자기 포기를 각오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버리는 것”(마태 16, 24)이다.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 주장만을 관철시키려 할 때 상호 이해는 불가능하기 마련이다.


둘째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기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황금율이라 일컫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는 말씀의 현실적인 사고방식이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아무도  쉽게 이행하지 못하는 말씀이다. 사람에게서 이기심을 빼버리면 어쩌면 사람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기심을 절제할 수 있다면 그는 가장 덕망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본다는 것은 자기의 이기심을 억제하는 것이다. 자기 우선이라는 이기적 본성을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겸손된 봉사 정신이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 28)는 주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내용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윗자리에 앉아서 거들먹거리며 명령하기를 좋아한다. 밑에서 굽신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명령하는 자와 복종하는 자가 서로 같은 봉사 정신이 없을 때 정의와  평화 그리고 용서란 있을 수 없다.

명령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 권한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고, 다른 사람의 권익과 인권을 보호하고 존중하기 위해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용서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서로 용서함이   없다면 세상은 자멸하고 말 것이다. 사실 용서하기 싫은 경우가 너무나 많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고 치가 떨릴 만큼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 복수하는 방법은 단 하나이다. 하느님께 맡겨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못할 짓인 것 같지만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자.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행복해진다. 복수의 칼을 갈고 있을 때는 마음이 불안하고  신경질적이 되어 불행 중의 불행을 맛본다. 인생은 용서하며 사는 것을 배우는 과정인 것 같다.


이 모든 것을 일일이 답변하고 복수하고 응징하고 산다면 세상은 너무나 고달프다.


우리의 인생은 즐거워야 한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즐겁게   사는 비결은 용서하는 것 뿐이다. 참고 용서하고 이해하며 사랑하려고 마음먹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 최대의  미덕은 용서할 줄 아는 것이다. 용서함이 없는 곳에는 결코 이웃   사랑이 있을 수 없고, 용서하는 마음이 없이는 고해실에 들어 올 수 없다.


(《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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