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수신부의 홈
김충수신부의 홈

left_menu


가엾은 미소들
김충수 신부  (Homepage) 2009-06-22 00:08:28, 조회 : 1,247, 추천 : 375

가엾은 미소들

가엾은 미소들


옛날 얘기다.

거리의 풍경을 한참 관찰하노라면 이따금 묘한 표정을 발견할 수 있다. 흔히 ‘우선 멈춤’ 표지가 있는 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가로수  근처나 다른 은폐물 근처에서 벌어지는 광경이다. 어디엔가 숨어   있다가 툭 튀어나온 교통순경과 죄많은(?) 운전사와의 표정은 멀찍이서 보아도 대조적이다. 교통순경은 고자세이고, 범법을 한 운전사는 비굴할 만큼 저자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운전사의 굽신대는 허리와 통사정을 하려는 작전에 나타난 불안하고 가엾은 미소는 쳐다보기  조차 민망하다.

게다가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대목은 소위 ‘담합’하는 장면이다. 가지각색의 방법이 있단다. 면허증에 일금 얼마를 아예 끼워놓고 미리 타협안을 내놓는 방법도 있고, 면허증만 맡기고 잠시 후에 오겠다는 방법도 있고, 현장에서 귀신도 모르게 돈을 챙겨 주는 방법도 있다고들 한다. 또 어떤 순경은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담배값이나 막걸리 값을 달라고 한다는데 이 편이 죄많은 운전사들에게는 가장  고맙고 편리한 방법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더욱 지나쳐 버릴 수 없는 풍경은 뇌물을 받고 난 뒤에   따라오는 교통순경의 표정이다. 지금까지의 고자세와 저자세는 일약 돌변하여 뇌물을 받아먹은 교통순경이 저자세이고, 뇌물을 준 운전사는 고자세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순경은 운전사에게 경례를 붙여  주면서 가벼운 미소를 날린다. 이 미소야말로 가엾기 짝이 없는 미소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풍조가 사라졌다고 한다. 명실공히 새 질서 새  거리의 풍경은 한결 정숙하고 부드러워진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말에 의하면 단속이 심하면 심할수록 소위 ‘담합’ 단가만 높아진다는 것이다. 슬픈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선진국에서는 원리원칙대로 범법자에게는 스티커를 발부하고, 범법자는 정해진 날짜에 벌금만 물면 된다고 한다. 뒷처리도 복잡하게  면허증을 압수하거나, 교양을 받거나, 경찰서에 가서 죄인처럼 떨며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한다.

경찰서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이곳이 또한 이상한 표정을 짓게 하는 곳인 것 같다. 행여라도 순경들이 고자세로 딱딱거릴라 치면,  용건이 있어서 들어간 죄없는 사람들까지도 대부분은 저자세로 가엾은 미소들을 흘려야만 하는 곳이다. 이럴 때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민중의 곤봉’인 것 같다.

엄연히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갖고 있는 똑같은 사람들인데 어째서 관직에 있는 사람은 콧대가 높아야 하고, 양순한 서민들은 콧대가  납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지 않아도 원래 납작한 동양인의   코가 그 가엾은 미소에 깔려서(?) 더욱 더 납작해지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서울신문>, 1981. 9. 18)



  추천하기   목록보기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12  벼랑 끝에 선 당나귀 운전사    김충수 신부 2009/06/22 325 1498
11  박살내고 싶은 컴퓨터    김충수 신부 2009/06/22 316 1372
10  면도칼과 하느님    김충수 신부 2009/06/22 306 1266
9  멱살잡힌 신부의 괴변    김충수 신부 2009/06/22 336 1404
8  로만 칼라의 멋과 그 인생    김충수 신부 2009/06/22 320 1494
7  땡큐의 위력    김충수 신부 2009/06/22 338 1293
6  달팽이과(科) 인생    김충수 신부 2009/06/22 379 1261
5  고해실 창구에 얽힌 사연    김충수 신부 2009/06/22 350 1401
4  경매붙여진 예수님    김충수 신부 2009/06/22 369 1239
3  겨자씨가 품고 있는 천국의 열쇠    김충수 신부 2009/06/22 319 1379
 가엾은 미소들    김충수 신부 2009/06/22 375 1247
1  김충수 신부의 수상집    김충수 신부 2009/06/21 289 1404

    목록보기 1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