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수신부의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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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수 신부의 수상집
김충수 신부  (Homepage) 2009-06-21 17:11:26, 조회 : 1,403, 추천 : 289

가엾은 미소들

현상 붙은 사나이 김충수


--- 차 례 ---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1. 신경질 난 예수님

  2. 예수님도 화장실 가셨을까?

  3. 면도칼과 하느님

  4. 경매붙여진 예수님

  5. 창녀들의 슈퍼스타

  6. 세가지 유혹

  7. 잔인한 예수님

  8. 사다새의 슬픈 사랑

  9.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10. 컴퓨터로 본 하느님

 11. 예수님의 사랑과 기적


�� 신부(神父)이기에...


 12. 신부이기에 더욱 악랄해진 것

 13. 로만 칼라의 멋과 그 인생

 14. 고해실 창구에 얽힌 사연

 15. 신부와 연애

 16. 신부와 무당

 17. 현상 붙은 사나이 김충수 신부

 18. 얼굴 찢어진 사나이의 열변

 19. 멱살 잡힌 신부의 괴변


�� 한바탕 웃음 속에 서린 눈물


 20. 여자 같은 남자의 이변

 21. 성당이 떠나가라 웃었던 일

 22. 외상 영세와 나이롱 신자

 23. 인사하고도 뺨맞는 세상

 24. 하루살이의 주제 파악

 25. 살고 싶은 사람만 볼 것

 26. 천당에도 골프가 …

 27. 천당과 지옥의 전화번호

 28. 이혼할 사람은 다 내게 오시오

 29. 야, 너 누구냐?

 30. 서고붕대 해체의 기쁨과 충격

 31. 가엾은 미소들

 32. 박살내고 싶은 컴퓨터

 33. 벼랑 끝에 선 당나귀 운전사


�� 아름다운 그리스도인


 34. 임금님의 사위감

 35. 인간 대접

 36. 사랑해야만 살 수 있는 동물

 37. 땡큐의 위력

 38. 달팽이과(科) 인생

 39. 겨자씨가 품고 있는 천국의 열쇠

 40. 자선은 필수 과목

 41. 일곱살 먹은 노인


�� 성령 쇄신 운동 소고


 42. 선무당이 사람잡는 이야기 (1)

 43. 선무당이 사람잡는 이야기 (2)

 44. 선무당이 사람잡는 이야기 (3)

 45. 선무당이 사람잡는 이야기 (4)

 46. 선무당이 사람잡는 이야기 (5)

 47. 성령 쇄신 운동과 마귀 장난

 48. 성령 쇄신 운동에의 기대

 49. 성령 세미나 고발

 50. 산(山)기도와 철야 기도의 정체(?)

 51. 주시옵소서판 기도회

 52. 우습게 보았던 성령 쇄신

 53. 우리의 친구 - 사탄!



-----------아   래-----------







가엾은 미소들


옛날 얘기다.

거리의 풍경을 한참 관찰하노라면 이따금 묘한 표정을 발견할 수 있다. 흔히 ‘우선 멈춤’ 표지가 있는 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가로수  근처나 다른 은폐물 근처에서 벌어지는 광경이다. 어디엔가 숨어   있다가 툭 튀어나온 교통순경과 죄 많은(?) 운전사와의 표정은 멀찍이서 보아도 대조적이다. 교통순경은 고자세이고, 범법을 한 운전사는 비굴할 만큼 저자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운전사의 굽실대는 허리와 통사정을 하려는 작전에 나타난 불안하고 가엾은 미소는 쳐다보기  조차 민망하다.

게다가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대목은 소위 ‘담합’하는 장면이다. 가지각색의 방법이 있단다. 면허증에 일금 얼마를 아예 끼워놓고 미리 타협안을 내놓는 방법도 있고, 면허증만 맡기고 잠시 후에 오겠다는 방법도 있고, 현장에서 귀신도 모르게 돈을 챙겨 주는 방법도 있다고들 한다. 또 어떤 순경은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담뱃값이나 막걸리 값을 달라고 한다는데 이 편이 죄 많은 운전사들에게는 가장  고맙고 편리한 방법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더욱 지나쳐 버릴 수 없는 풍경은 뇌물을 받고 난 뒤에   따라오는 교통순경의 표정이다. 지금까지의 고자세와 저자세는 일약 돌변하여 뇌물을 받아먹은 교통순경이 저자세이고, 뇌물을 준 운전사는 고자세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순경은 운전사에게 경례를 붙여  주면서 가벼운 미소를 날린다. 이 미소야말로 가엾기 짝이 없는 미소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풍조가 사라졌다고 한다. 명실공히 새 질서 새  거리의 풍경은 한결 정숙하고 부드러워진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말에 의하면 단속이 심하면 심할수록 소위 ‘담합’ 단가만 높아진다는 것이다. 슬픈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선진국에서는 원리원칙대로 범법자에게는 스티커를 발부하고, 범법자는 정해진 날짜에 벌금만 물면 된다고 한다. 뒤처리도 복잡하게  면허증을 압수하거나, 교양을 받거나, 경찰서에 가서 죄인처럼 떨며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한다.

경찰서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이곳이 또한 이상한 표정을 짓게 하는 곳인 것 같다. 행여라도 순경들이 고자세로 딱딱거릴라 치면,  용건이 있어서 들어간 죄 없는 사람들까지도 대부분은 저자세로 가엾은 미소들을 흘려야만 하는 곳이다. 이럴 때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민중의 곤봉’인 것 같다.

엄연히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갖고 있는 똑같은 사람들인데 어째서 관직에 있는 사람은 콧대가 높아야 하고, 양순한 서민들은 콧대가  납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지 않아도 원래 납작한 동양인의   코가 그 가엾은 미소에 깔려서(?) 더욱 더 납작해지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서울신문>, 1981. 9. 18)













겨자씨가 품고 있는 천국의 열쇠


내가 어릴 때 천국은 하늘 높은 곳 그 어디쯤에 있는 줄 알았다.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우면서 천국의 존재가 오히려 희미해졌다. 나이가 들면서 천국이란 한낱 환상에 불과한 페다고지(Pedagogy)가 아닌가 싶은 의혹도 생긴다. 천국에서도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던 기쁨과 슬픔, 만남과 헤어짐, 먹고 마시며 농담하며 유쾌하게 웃는 일   등이 있을까…? 그밖에 또 다른 많은 친구와 애인(?)들을 만나서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추억에 잠길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가 통념적으로 알고 있는 천국은 그러한 재미가 없는 곳 같다. 즉 아무런 고통도 불행도 슬픔도 없이 끝없는 즐거움과   행복 속에서 세상에서의 고통과 슬픔의 기억도 없이 영원토록 뜬구름 속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소리만 연발하는 따분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유치하고 애매한 의심들을   확연히 풀어 줄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다만 예수님만이 우리가 꿈꾸는 천국을 비유로 말씀해 주시면서 우리의 철없는 생각들을 바꾸어 놓으신다.

천국은 자나라는 씨와 같고, 그것도 아주 작은 겨자씨와 같다고  비유로 말씀하신다. 이 짧고 뚱딴지(?) 같은 비유는 우리의 천국에  대한 어리석지만 순수했던 동심마저 확 깨버리는 기분이 든다. 천국은 우리가 꿈꾸는 그런 환상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천국은 겨자씨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줄기가 오르고 잎이 돋고… 점점 자라서 큰 나무가 되는 것과 같이 성장해 가고 있고 완성을 향해 나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또한 씨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줄기가 돋아서 나무가 되는 과정 속에 담겨 있는 생명의 신비를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천국의 비밀을 완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생명이 있기에 싹이 돋고 줄기와 잎이 나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상태의 이면에는 반드시 신비의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계속적으로 자라서 완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완성의 날이 바로 천국의 도래가 아닌가 싶다.


모든 자연의 성장 과정이 말해 주듯이 모든 것의 시작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놀라운 발전과   성장을 보게 된다. 여기에 바로 희망이 서려 있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도 이와 같이 역사의 발전과 성장 과정 속에서 계속 열려 가고 있고, 커지고 있고, 전진하고 있으며 우리 인류 모두가 향해 가고   있는 곳이다. 그 완성의 날은 이른바 종말이며 그때는 농부가 추수할 때처럼 좋은 열매는 거두어들이고 빈 쭉정이는 불에 태워버리는 추수와 심판이 따른다.


우리가 천국에 대해서 가져야 할 태도도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일확천금을 꿈꾸듯이 단 한번의 큰 선행으로 행복의 전당인 천국을 따내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꾸준히 노력하고 준비하고 참고 기다리는 가운데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한다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요청이며 희망 사항이다. 모든 것의 완성, 모든 선의의 노력의 결정체로 나타나는 곳이어야 한다.  행여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진탕 먹고 마시며 즐기다가 죽을 때가서나 살짝 회개해서 천국에 들어가야지 하는 생각은 오늘의 비유 말씀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이야기다.


시작은 작고 초라하며 무의미한 것 같지만 항상 인내와 끈기와   희망으로 선행의 씨앗을 매일매일 심어야 한다. 매우 작은 겨자씨  한 알이라도 무시하고 짓밟아버려서는 안 된다. 겨자씨와 같은 작은  씨앗이 마침내는 커다란 나무를 형성한다는 생명의 신비 속에서 우리는 천국의 열쇠를 찾아야 한다.


(<서울주보>, 1985. 6. 16)



경매 붙여진 예수님


전 세계 수억의 사람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부른다. 너도 나도 막무가내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간단하게 혹은 길게, 소리쳐서 부르기도 하고 마음속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세상에 “하느님!”이란 소리를 내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다못해 “하느님 맙소사”라든지 “갓땜”(GOD DAMN)이라든지 하는 저주의 형식을 빌어서라도 한번은 부르고 넘어 갈 것이다.

그중에서도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너무나도 쉽게 불러댄다. 밥 먹을 때도 부르고, 일할 때도 부르고, 기쁠 때도 부르고, 화날 때도 부른다. 사사건건 정신없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 형식도 다양하다.

“하느님, 아버지, 오 주여, 신이여, 제발 주님, 자비하신 주님, 사랑이신 주님, 창조자이신 주님, ….”

이밖에도 무수한 형용사를 동원해서 정말이지 숨 가쁘게 불러 대고 있다. 주님의 귀가 인간의 귀라면 신경질이 나다 못해 노이로제나  정신병에 걸렸어도 한참은 걸렸을 것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들 주님을 부르고 있는 것일까? 이유도 목적도  가지각색이다. 먹을 것을 달라는 기초적인 요청에서부터 입을 것과 살 곳, 취미, 오락, 부귀, 영화, 권세와 영광 그리고 삶이냐 죽음이냐  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이름은 쉽없이 불러지고 있다. 그야말로 경매 시장에서 제각기 액수를 말하며 흥정하는 뭇  군상들의 군침 도는 상품으로 전락된 이름이 아닌가 싶다.

도대체 우리는 오늘 왜 주님을 부르고 있는가? 어떻게 부르고 있는가? 누구라고 생각하며 부르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무턱대고 주님의 이름만 부른다고 그 요구 조건이 다 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행동이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말로만 주님을 공경하고 찬미하고 사랑한다고 갖가지 아양을 부려도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주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마르 8, 34).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제일 뿌리깊이 박혀 있는 이기심, 자존심, 자애심을 버린다는 것이다. 나를 앞세우고 내 이익을   추구하고, 내 권위와 명예를 생각하고 내 의견 내 주장만을 고집하려 한다면 주님의 이름을 옳게 부를 수 없다.

그리고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명예스러운 자아 포기에서 부수적으로 와 닿는 아픔이다. 예를 들면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아픔, 가진 것을 나누는 아픔, 참고 견디는 아픔, 잘난 자기를 낮추고 못난 상대방을 높여 주는 아픔 등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광의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를 질 용기나 의지가 없으면 주님의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고, 불러도 소용없다.


십자가 없이 부르는 “주님!”은 앵무새의 노래 소리보다도 결코   아름답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이름은 경매 시장에 걸려진 상품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 높이 매달린 위대하고 숭고한 사랑이다.

(<서울주보>, 1984. 3. 4.)

고해실 창구에 얽힌 사연


신부가 되고 처음으로 고해실에 앉았을 때의 기분은 신부밖에 모른다. 신부가 되기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총고백을 하기 위해서 며칠을 반성하고 통회하고 얼마나 식은땀을 흘렸는지… 고백성사를 제대로 보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식은땀 냄새를   맡는 자리에 내가 앉게 되던 첫날, 나는 무척이나 흥분하고 당황에 있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신부가 되기 전에 이러저러한 죄를 고백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무슨 죄를 고백해올까 하며 은근한 호기심과 엷은   감홍색(?) 흥분 때문에 이두박근이 긴장됨을 느껴야 했다. 그런데   기대했던 거와는 영 딴판이었다. 아니, 그럼 어떤 죄를 듣기를 기대했는데 딴판이란 말인가…?

흔히 들을 수 있는 고백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죄 아닌 죄’(?)를  고백해 온다는 데 문제를 걸고 싶은 것이다.

“조만과를 궐했습니다. 삼종 기도를 빼먹었습니다. 묵주신공을 한번 못했습니다. 이웃 집에 불이 나서 불꺼주느라고 주일미사 한번 궐했습니다. 기도 시간에 분심잠념했습니다. 애들을 야단쳤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너무나 착하고 순진한 우리 신자들의 소박한 고백이다.

그러나 이것이 소박함으로 끝났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실생활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어떤 타성들이 있다는 것을 지적해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진정한 ‘이웃 사랑’을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교의 가장 근본이 되는 사상이고 강론 때마다 듣는 이야기이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태 19, 19).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마태 7, 12).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그런데 고백실 안에서 혹시라도 사랑의 계명을 어긴 것을 고백할 때는 꼭 어떤 이유와 핑계까지 늘어 놓음으로써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음을 엿보게 된다. 예를 들어 “며느리를 미워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 치고 며느리의 죄상을 함께 일러바치지 않는 시어머니가 별로 없는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의 죄만 용서받고 싶은 것이지 남의 죄는 용서해 줄 수 없다는 마음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미사 때 ‘주의 기도’는 낭랑한 음성으로 소리 높여 왼다.

“오늘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스스로 용서의 절대적인 조건을 “우리가 용서하듯이”라고 굳게   힘주어 말하면서도 그 실천은 앵무새에게 돌리고마는 것이다.

용서란 말이 나왔으니 주님께서는 어떻게 용서하라고 가르치셨는지 살펴보자. 우선 당신 자신이 실천하신 것부터 찾아보면 당신이 십자가 위에 높이 매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 34).

이렇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던 사람들까지 용서해 주시는 주님께서는 “몇 번이나?” 하는 제자들의 물음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 18, 22)고 대답하심으로써 용서란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것임을 가르쳐 주셨다.

참된 이웃 사랑이란 이렇게 용서와 자비를 전제한 가운데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아무리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위로와 사랑을   보낸다 하더라도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서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정신을 닮지 못하는 것이다. 불쌍한 사람을 동정해 주고, 우는 이를 위로해 주고, 아픈 자를 찾아 주고… 하는 것은 서로 밉지 않은 상태일 때는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미운   사람, 원수진 사람, 자기에게 불쾌한 짓을 한 바 있는 사람일 때는  동정이고 자비고 마음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먼저 용서하는 마음을 배우고 모든 잘못하는 이들을 향한 너그러운 이해와 그리스도적 자비를 배워야 한다.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 비결은 첫째 자기 포기를 각오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버리는 것”(마태 16, 24)이다.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 주장만을 관철시키려 할 때 상호 이해는 불가능하기 마련이다.


둘째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기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황금율이라 일컫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는 말씀의 현실적인 사고방식이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아무도  쉽게 이행하지 못하는 말씀이다. 사람에게서 이기심을 빼버리면 어쩌면 사람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기심을 절제할 수 있다면 그는 가장 덕망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본다는 것은 자기의 이기심을 억제하는 것이다. 자기 우선이라는 이기적 본성을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겸손된 봉사 정신이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 28)는 주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내용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윗자리에 앉아서 거들먹거리며 명령하기를 좋아한다. 밑에서 굽실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명령하는 자와 복종하는 자가 서로 같은 봉사 정신이 없을 때 정의와  평화 그리고 용서란 있을 수 없다.

명령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 권한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고, 다른 사람의 권익과 인권을 보호하고 존중하기 위해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용서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서로 용서함이   없다면 세상은 자멸하고 말 것이다. 사실 용서하기 싫은 경우가 너무나 많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고 치가 떨릴 만큼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 복수하는 방법은 단 하나이다. 하느님께 맡겨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못할 짓인 것 같지만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자.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행복해진다. 복수의 칼을 갈고 있을 때는 마음이 불안하고  신경질적이 되어 불행 중의 불행을 맛본다. 인생은 용서하며 사는 것을 배우는 과정인 것 같다.


이 모든 것을 일일이 답변하고 복수하고 응징하고 산다면 세상은 너무나 고달프다.


우리의 인생은 즐거워야 한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즐겁게   사는 비결은 용서하는 것 뿐이다. 참고 용서하고 이해하며 사랑하려고 마음먹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 최대의  미덕은 용서할 줄 아는 것이다. 용서함이 없는 곳에는 결코 이웃   사랑이 있을 수 없고, 용서하는 마음이 없이는 고해실에 들어 올 수 없다.


(《사목》)


달팽이과(科) 인생


선인(善人)들이 하늘 나라의 문 앞에 모여 앉아서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를 고대하며 자기들의 자리가 이미 예약되어 있다고 고함을 치며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죄인들도 용서해 주실 것 같더라.”

이 소문을 듣자 거기에 모여 있던 선인들은 말문이 막힌 듯 의아한 얼굴로 서로 쳐다보기만 한다.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 같다. 얼마   만일까? 누구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사뭇 노기띤 음성으로 거기 모인 모든 선인들의 마음속에 있는 말을 대변하고 시작한다.

“결국 우린 헛수고만 했군! 우리가 이런 사실을 미리 알기만 했더라도 그렇게 고생하며 살지는 않았을 텐데… 이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요!”

일종의 궐기를 주도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선인들은 하느님을 원망하며 불평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들은 하느님의 벌을 받아 지옥행 열차를 타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프랑스의 희곡작가 장․아누일이 최후의 심판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나는 달팽이를 볼 때면 자기 혼자만의 아늑한 밀실을 갖고 있는  요령있는 놈이라고 생각해 본다. 행여 손가락 끝으로 머리 부분을  툭 건드려보면 순발력 있게 ‘쏙’하고 밀실로 움츠러든다. 무척 편리하고 안전한 자기 보호 체제를 갖춘 놈이다.

우리 사회 안에도 이해와 용서와 협동이라는 공동체의 생활 윤리를 무시한 채 자기만의 안전과 평안을 위해서 제법 까다롭게 구는 사람들이 많다. 남의 잘못은 용납 못하고 자기의 잘못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하며 구구한 변명이 많은 사람들도 있다.

자칭 그들은 선인이며 누구에게나 신세를 지거나 손해를 주지도  않는다고 장담한다. 때로는 신문에 이름 석 자를 내기 위해서, 혹은 TV 화면에 잘난 얼굴 한 번 비춰 보기 위해서 수재 의연금도 내본다. 자기에게 유익이 생기면 생색을 내지만 조금이라도 손해가 올  양이면 재빨리 은폐를 잘하는 수완가(?)도 많다.

하늘 나라 문턱에서 농성을 벌이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좋은 일이란   부정적인 의미의 좋은 일이다. 즉 사람을 죽인 일도 없고, 도둑질한 일도 없고, 강간을 한 일도 없고, 남에게 큰 손해를 끼친 일도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얼마나 이웃을 사랑했느냐, 얼마나 남의 의견을 존중했느냐, 얼마나 남의 잘못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협동했느냐… 하는 것이 진짜 선인의 척도이다.

이 물음에 고개가 매양 갸우뚱한다면 우리의 생활은 달팽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서울신문>, 1981. 9. 11)

땡큐의 위력


누구 말처럼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미국 구경을 해 보았다. 벌써 3년 전 일이다. 미국의 풍토와 습관을 모르고 무작정 상륙(?)했었으니 그 무수한 실수들을 말하지 않아도 경험자들은 알 것이다. 그중에서도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부끄러운 추억 한 가지를 고백해 볼까 한다.

어느 미국 신부님과 레스토랑에 갔었다. 메뉴를 보아야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서 그 신부님이 주문하는 대로 나도 따라서 주문했다.   이쯤 얘기하면 독자들은 벌써 내가 무슨 신수를 저질렀는지 지레짐작을 하고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저지른 실수는 음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종업원에 대한 나의 태도에 있었던 것이다. 그 신부님은 종업원이 한번 왔다 갈 때마다 쓸데없이(?) “땡큐”(감사합니다)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하다못해 메뉴표를 집어 주는 것에서부터 냅킨, 스푼, 포크, 음식, 기타 등등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땡큐”를 해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러나 보다 하고 별 생각이 없었는데 그 신부님이 사사건건 “감사합니다”는 말을 하는 바람에 난 그만 미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는 슬슬 따라하기 시작했지만 숙소에 들어와서 곰곰이 생각하니 굉장한 수학(修學)이었다. 미국인들의 일상 속에 깔려 있는 이 “감사하다”는 말은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를 창생한 무서운 기적의 힘 그 자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나라의 풍속도를 그려보면 무척 대조적이다. 어느 식당에를 가든지 종업원이 음식을 날라다 주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음식을 날라다 준 종업원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비상식에 가깝다.

오히려 음식을 돈 내고 사는 입장에 선 손님은 어디까지나 권리가 당당하기에 때로는 반말짓거리를 하는 것도 불사한다.

“야, 왜 이렇게 늦어? 빨리 좀 가지고 와! 물수건도 좀 가지고    오고…, 고춧가루, 후춧가루는 안 갖다 주는 거야… 음식 맛이 왜 이  모양이야… 요지(이쑤시개) 좀 가져와… 등등.”

종업원을 어지간히 부려먹고 싶어 한다. 게다가 말투가 어쩌면 그렇게 모조리 시비조인지 모르겠다. 음식점에서만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감사합니다”는 말은 하루에 한번 쓰기도 어렵다. 우리가 혹시 감사하다는 말을 쓴다면 그것은 누구에선가 고마운 선물을 받았을 때 뿐인 것 같다. 그런데 그때는 비굴할 정도로 굽실거리며 한번도 아니고 수십번씩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거 어떻게 하죠…?”라고 하며 만면에 희색을 띤다.

미국인들의 일상 속에 기적을 이룬다고도 볼 수 있는 감사의 습관과 우리 나라의 비감사(?)의 습관은 어디가 다른 것일까. 우선 기분이 다르다. 서로 감사하는 정이 오고 갈 때 그 분위기는 명랑할 수밖에 없다. 명랑한 분위기는 밝은 사회를 건설한다. 밝고 명랑한 사회란 평화가 있다는 말이고, 평화가 있으면 안정과 번영이 있다. 반대로 감사 대신 시비와 퉁명스러운 어투가 만연한 사회는 어둡고 불안하다.   어둡고 불안한 사회 속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될 수 없고 따라서 발전과 번영을 기대할 수 없다.

한 가정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를테면 부부 사이에서 또는 부자지간, 모녀지간, 고부지간에 서로 감사하다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가정이란 결코 명랑할 수가 없고 평화로울 수가 없을 것이다.

아침에 아내가 일찍 일어나 밥을 지어놓고 세숫물을 떠다 놓으며 일어나라고 재촉할 때부터 생각해 보자. 아내의 수고에 감사는커녕 곤한 잠을 깨운다고 신경질이 슬그머니 나겠다. 밥상을 들고 들어온 아내에게 “고마워, 여보! 수고했어!” 한마디 하면 조상이 덧나는 줄 아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퇴근 시간의 풍경도 만만치 않다. 사정이 있어서 늦게 들어오건  술을 한잔하고 늦게 들어오건 우선 아내가 반갑게 맞이하여 웃옷을 받아 걸며 “여보, 오늘 수고 많이 했죠?”하고 감사의 인사를 한다면  얼마나 분위기가 있겠는가.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기적을 이룰 만큼 위대한 말이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라”(Ⅰ데살 5, 18)고 바오로 사도도 가르치신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여전히 감사하라는 말씀이다. 기쁜 일이 있을 때는 감사를 하기가 쉽지만 슬픈 일이 있을 때 감사를 드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하느님께   감사하고 하느님 섭리에 대해서 찬미와 영광을 바칠 수 있다면 그는 기쁨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이 가르침의 요지이다. 무리한   이야기 같지만 한번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의 일상에서 “감사하다”는 말은 자주 쓰도록 해 보자. 가정 안에서, 길거리에서,  버스 안에서, 직장에서… 어디에서든지 감사할 일이 없을까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자. 아주 즐거운 일이 될 것이고,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되어질 것이다. 지금 당장 돌아서서 감사할 일이 없을까 찾아보자. 정말 신나는 생활이 될 것이다.


(<한국일보>, 1981. 10. 30)


로만 칼라의 멋과 그 인생


요즈음은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인 듯 싶다. ‘로만 칼라’라고 하면 로마 가톨릭 신부들의 전통 의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개신교 목사님들이 더 즐겨 이 복장을 하고 다닌다. 반면 신부님들은 넥타이를 즐겨 착용하며 흔히는 허름한 잠바를 걸치고 길거리뿐 아니라 점잖은 예식에까지 과감히 등장하기도 한다.

부끄러운 추억이 하나 생각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과거에는 신학교 1학년이 되면(지금으로 말하면 3학년 때이다) 삭발례라고 해서  머리를 조금 깎아내고 수단(성직자의 복장)을 착복하였다. 그때 이 복장을 하고서 얼마나 좋아하고 흥분했는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안다. 어린 마음에 나는 너무나 자랑스럽고 뽐내고 싶어서 방학 때 시골  동네에까지 가지고 갔었다. 그리고 기어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주일 미사에 그 수단을 입고 참례했었다. 여기까지는 신학생으로의 전시 효과도 좋았고 꽤 우쭐거릴 수가 있었다. 그런데 한가지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할머니가 90도 각도로 절을 하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신부님, 고백성사 좀 주세요.”

그후 군대 생활 3년과 나머지 신학교 생활 3년을 마치고 드디어  그렇게도 소망하던 신부가 되었다. 소신학교(중․고등학교 과정) 생활까지 포함하면 15년만에 어린 시절부터의 절대적인 포부와 평생의  소원을 이룬 것이다. 나는 신학생 생활 15년 동안 한번도 “신부가  되지 말까?”하는 생각을 가져 보지 못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퇴학 보류 처분을 몇 번 받았었는데 그때마다 땅이 꺼지고 하늘이 노랗게 변색된 것 같은 매우 절박하고 처참한 느낌을 가졌던 기억이 아직도 몸서리쳐진다.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가사 중 일부를 고쳐 “나는   다시 태어나도 신부가 되리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해마다 성소주일이 되면 나는 자신 있게 어린이들에게 또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사제다.”

그래서 나는 공식석상에는 물론이고, 가장 멋쟁이 옷차림을 하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로만 칼라’를 즐겨 착용한다, ‘로만 칼라’는 멋있는 색깔의 조화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아름답고 순결한 이미지가   풍겨서 좋다. 까만 옷에 하얀 칼라로 목을 가리우는 이 복장은 나를 세속에서 보호하고, 나 자신이 신부라는 자아의식을 항상 새롭게   해준다.

어려서부터 아니 태중 교육에서부터 사제로 키워 주신 어머니의  정성 덕분에 나는 죽을 때까지 사제로 살다가 영원한 멜키세덱의   사제직에 참여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산다. 내가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 신부님이셨던 외삼촌이 어머니께 말씀하셨단다.

“장차 태어날 아이가 사내 녀석이면 신학교에 보내고, 여자아이면 수녀원에 보내라.”

말하자면 꼬리표 달린 운명을 시작한 셈이다. 신학생 시절의 기도는 오직 한가지였다.

“예수님! 꼭 착한 신부가 되게 해주세요.”

그리고 신부가 된 후의 기도는 이렇게 계속되었다.

“죽을 때까지 변치 말고 신부로서 잘 살게 해주십시오.”

무엇 때문에 나는 이렇게 신부 생활을 좋아하고 ‘죽을 때까지’ 절대적인 숙명처럼 이 생활을 하겠다고 고집하는가?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고자가 되었고…… 어떤 사람은 하늘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고자된 사람도 있으니……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태 19, 12).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러므로 일차적인 목적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데 있다는 것이 틀림없다. 또한 현세적으로 여러 갑절의 상을 받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 때문에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의 상을 받을 것이며…” (루가 18, 19~30).

그러나 정말 행복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는 사실에서 엄청난 보람과 긍지를 갖기 때문이다. 보잘 것 없는 한 인간이지만 사제인 덕분에 사람들이 구원의   열매를 맺고 기쁨과 사랑을 되찾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멋있는 삶이다. 대통령도 부럽지 않은 직책이 바로 이 영생의   길을 인도해 주는 봉사자의 직책이라고 자부하고 싶다!

그렇다고 사제 생활 24시간이 마냥 즐겁고 희망에 넘치고 매순간 의욕적인 것은 아니다. 솔직히 신부들에게도 베드로 사도가 당했던 사탄의 유혹에 빠질 위험이 언제나 있다. 주님께서 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다. 그 길을 막으려던 베드로의 심정도 이해할만하다.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펄쩍 뛰는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사정없이 호되게 야단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마태 16, 23).


처음 신부가 되었을 때는 미사 드리는 것, 고백성사 주는 것, 성세, 혼인성사 주는 것 모두가 마냥 신이 나서 정성과 열을 다해 게다가 폼까지 잡아가면서 곧잘 한다. 그래서 칭찬도 받고 인기도 상승한다. 특히 총각이라는 보증 수표(?) 때문에 처녀들의 인기는 그 신부가  잘생겼거나 못생겼거나 간에 대단한 것이다. 그러다가 십 년이 훌쩍 지나가고 40이라는 인생의 갱년이 문턱을 저만치 바라볼 때 인기도는 슬그머니 하락하기 시작한다. 그때부터는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고통받는 사람이 떼거지로 몰려와서 하나같이 죽고 못살겠다는 하소연과 푸념만 나열하기 시작한다. 미사 드리는 것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계화되어서 마치 성호경이 자동 스위치나 되듯이 미사가  시작되면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까지 일사천리로 숨쉴 겨를도 없이 달려가고 마는 경우도 있다. 잘못하면 미사 드리는 로봇이 되기 꼭 알맞다.

바로 이때부터 신부 생활은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장 성숙하고 숙련된 봉사 생활을 할 수 있다. 이때부터의 사제 생활은 수확의 계절이라고나 할까…? 온갖 유혹과 장애물과 타성과 기계화된 생활과의   투쟁이 성숙도를 높여 가는 것이다. 권태와 육체적인 피로와도 싸워야 한다. 만나는 모든 사람을 더욱 친절하게, 병들고 소외된 모든   형제들에게 느긋한 벗이 되어 준다는 것이 별난 보람이다. 주위에서는 느닷없이 아끼던 친구, 친지들의 죽음을 알려온다. 너무나 애석하고 통분을 금할 수 없는 비극들이 점점 극성을 부리는 것 같다.

이럴 때마다 나의 로만 칼라는 어느새 조금 퇴색된 색깔이 채 뻔질나게 내 목에 감겨진다. 목에서 칼라를 떼고 쉴까 하는 순간 또    한 통의 전화가 비보를 몰고 온다. 급히 달려갔다가 오는 길에 성당 입구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또 한사람의 불청객(?)을 만나게 된다.  속으로는 짜증이 나면서도 겉으로는 웃어야만 하는 희한한 생리에  이미 익숙해 있다.

모든 일을 끝내고 잘까 생각하니 원고 청탁이 밀려 있고, 강론   원고도 시급하다.

“바쁘다, 바뻐!” 하면서도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낙천적인 인생- 그 인생이 바로 로만 칼라의 인생이다.


(<경향잡지>, 1981. 5)


멱살 잡힌 신부의 괴변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 주라는 말씀(마태 5, 40)  이 있다. 성인이거나 아주 바보가 아니면 아무도 이 말씀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후르시초프도 이 말씀을 두고 한 말이 있다.

“나는 예수의 다른 말씀은 다 이해해도 이 말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 이 세상의 모든 보통 사람들은 이 말씀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주먹을 불끈 쥔다. 그러나 나는 이 말씀이 얼마나 위대하고 효과적인 평화의 원칙인지 경험으로 말하고 싶다. 나는 실제로 뺨도 맞아 보았고, 멱살도 잡혀 보았다. 정말이지 기분 나빴다. 신부만   아니었다면 멋지게 한방 날렸을 것이다. 그러나 참았다. 한마디의   반항도 복수심도 품지 않았다. 물론 마음속으로는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같이 멱살잡고, 같이 치고 받고 했다면 그 결과는 서로가  원수지간이 될 뿐 아무 이익도 없다는 생각에 끝내 참았다. 결국에는 상대방이 찾아와서 용서를 청했다. 다시 친해졌다. 물론 인간이기에 어떤 떨떠름한 감정은 남아 있지만… 여기서 나의 뺨을 치고 나의  멱살을 쥔 사람이 누구이며, 왜 그랬는가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또 말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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